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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보현        
작성일 2007-08-25 (토)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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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논문
   
청산리 대첩의 전황과 역사적 의의

1. 청산리대첩의 배경‥‥‥‥‥‥‥‥‥‥‥‥‥‥‥2

2. 청산리대첩의 전황‥‥‥‥‥‥‥‥‥‥‥‥‥‥‥2

가.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4

나.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5

다.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5

라. 어랑촌투(漁郞村戰鬪)‥‥‥‥‥‥‥‥‥‥‥‥6

마. 고동하곡전투(古洞河谷戰鬪)‥‥‥‥‥‥‥‥‥7

3. 결론‥‥‥‥‥‥‥‥‥‥‥‥‥‥‥‥‥‥‥‥‥‥7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05학번 한보현>


 1. 청산리 대첩의 배경

1920년 6월 4일 새벽 30명 가량의 독립군 소부대가 통상적인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삼둔자(三屯子)에서 두만강을 건너 동북방의 강양동으로 진격 한다. 일제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한 후 두만강을 다시 건너 귀환함으로 작전은 종료된다. 신미(新美)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순사 10여 명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러 분풀이로 무고한 한인 양민만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에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지방에서 이들을 공격, 섬멸시킨다. 이것이 삼둔자전투로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에 불법 침입한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獨立新聞》, 1920년 12월 25일,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제 19사단은 삼둔자에서의 참패 보복과 동시에 독립군 ‘토벌’을 계획한다. ‘월강추격대대’편성, 불법으로 중국령 북간도를 침범한다.  <安州追擊隊 ノ鳳梧洞附近戰]鬪詳報>(독립기념관 소장), 三. 彼我兵力.

 삼둔자 전투에서 참패한 신미 중대도 합류한 대부대로 편성되어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중심으로 작전을 개시 한다.

  홍범도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연합부대로 대한독립군과 신민단, 그리고 군무도독부로 편성된다. 이화일(李化日)이 인솔하는 독립군 소부대는 봉오동 밖의 고려령 북편 고지로 출동하여 유인작전을 수행 한다. 일본군 본대가 포위망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을 때 사령관 홍범도는 총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한다. 독립군의 완전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을 버티다 퇴각한다. 이때 독립군의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는 부하들을 이끌고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다시 큰 타격을 가한다. 《獨立新聞》, 1920년 12월 25일,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이것이 봉오동전투다.

  1920년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과 만주 실력자인 순열사(巡閱使) 장작림(張作霖)을 만나 ‘중일합동수색’이란 명목 하에 일제 군경을 동원해 독립군 탄압을 시도한다.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8, 67~68쪽.

 길림성장 서정임(徐鼎霖)을 비롯해 연길 도윤 장세전(張世銓), 보병 제1단장 맹부덕(孟富德) 등은 중일합동수색을 반대하고 일제 측의 동정을 사전에 독립군 측에 통지해 주었다. 그러므로 북간도에서는 중일합동수색이 실효를 거뒀다.

  일본군은 중국의 마적 장강호(長江好)를 금전으로 매수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 일제의 영사관 분관이 있던 훈춘을 습격케 한다.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8, 141~142쪽.

 이것이 훈춘사건이다. 훈춘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출동 대기상태에 있던 대규모의 병력을 사건 당일부터 간도에 투입한다.《間島出兵史》 上(金正柱 편, 《朝鮮統治史料》2, 韓國史料硏究所,1970), 17~20쪽.

 이로써 독립군과 직접적인 충돌에 대립한다.

2. 청산리 대첩의 전황

  청산리 전투는 소대부대의 독립군 활동에서부터 일본군의 보복행위, 그리고 간도침략으로까지 이어진다. 청산리대첩에서는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이 전투의 주력 독립군 부대로 편성된다. 그 밖의 부대로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국민회군(國民會軍), 의군단(義民團), 한민단(韓民團), 의민단(義民團)등의 독립군 단체들이 참여하여 조직한 독립군연합부대(獨立軍聯合部隊)가 있다. 이 전투는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북로군정서의 반격을 받은 전투이다. 여기서 시작된 전투는 이도구 부근으로 옮겨지면서 1920년 10월 26일 새벽까지 약 6일간 10여 차례의 대소 전투들이 쉴 새 없이 전개되어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을 패전시키고, 이도구와 삼도구에서 철수할 때가지 연속된다.

 더욱 면밀히 화룡현 이도구 · 삼도구 일대에서 아즈마 마사히코(東正彦) 소장이 지휘하던 일본군 주력부대를 맞아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봉밀구, 고동하 등지에서 벌인 대소 10여 회의 회전에서 독립군이 거둔 승첩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 최초의 전투인 백운평전투 교전지가 삼도구의 청산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곧이어 벌어진 여러 전투들까지도 ‘청산리’라는 지명으로 묶어 대첩의 이름으로 따오게 된 것이다.

  당시 북로 군정서의 임시전투조직의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사령관‥‥‥‥‥‥‥‥김      좌       진

참  모 정‥‥‥‥‥‥‥‥라      중       소

부      관‥‥‥‥‥‥‥‥박      영       조

연성대장‥‥‥‥‥‥‥‥이      범       석

종군장교‥‥‥‥‥‥‥‥이      경       화
                                  백      종       열
                                  한      달       원
                                  김                훈


보병 대대장‥‥‥‥‥‥ 김      규       식

제1중대장‥‥‥‥‥‥‥강      화       린

         제1소대장‥‥‥‥강      승       경

         제2소대장‥‥‥‥신      희       경

제2 중대장‥‥‥‥‥‥‥홍      충       희

         제1 소대장‥‥‥‥채               춘

         제2 소대장‥‥‥‥김      명       하

제3 중대장‥‥‥‥‥‥‥김      찬       수

         제1 소대장‥‥‥‥이      익       구

         제2 소대장‥‥‥‥정      면       수

제4 중대장‥‥‥‥‥‥‥오      양       세

         제1 소대장‥‥‥‥김      동       섭

         제2 소대장‥‥‥‥이      운       강

기관총대 1소대장‥‥‥‥김      덕       선

기관총대 2소대장‥‥‥‥최      인       걸

특   무   정  사‥‥‥‥‥ 라      상       원
                                   권      중       행


  한국 독립군부대를 포위한 일본군 동지대는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600명)을 토벌 섬멸하기 위해서 산전(山田:야마다)토벌 연대를 용정으로부터 삼도구 청산리 방면으로 보내어 10월 20일을 기해서 김좌진 부대를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린다. 「電報」朝鮮 第102號, 1920年 10月 19日字(發信 朝鮮軍司令官, 受信 陸軍호(1984) 참조.

 한편 이도구에 주둔하는 대한독립(300명), 국민회군(250명), 의군부군(150명), 한민회군(200명), 광복단군(200명), 의민단군(100명), 신민단군(200명)등의 홍범도연합부대에 대해서는 일본군 동지대의 지대장 동정언이 인솔하는 동지대의 주력이 19일 오전 8시를 기해서 이도구로 출동을 명령하였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천 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여 그 안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 부대를 10월20일을 기해서 총공격하여 섬멸하려고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暗號電報」第56號, 暗 No. 15600, 1920年 10月 19日字, 姜德相編, 『現代史資料』28, p. 318

     참조.

  독립군은 처음에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채택 했으나, 일본침략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추격해 들어오면서 한국인 촌락을 통째로 불 지르고 선량한 동포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것을 보고 결정을 바꾸어 일본침략군을 공격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청산리 대첩’이 시작된다.

가.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로 들어온 동지대(東支隊)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안도(安圖) 남쪽, 화용(和龍) 북방에 위치한 천보산(天寶山)에 주력을 두고 있다. 독립군이 백두산록에 자리 잡은 안도현이나 그 북쪽의 돈화현(敦化縣)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이 부대는 10월20일을 기하여 야마타(山田) 대좌가 지휘하는 이른바 야마타연대(聯隊)를 선두로 독립군에 대한 소위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8, 216~217쪽.

  청산리 일대로 투입된 동지대의 병력 규모는 중화기로 무장한 정예기병과 포병을 포함해 약 5천명으로 추산된다. 곧 이와 같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은 10월 20일 기해 대한군정서 및 독립군 연합부대에 대해 총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수립해 놓았던 것이다.  金靜美, 앞의 글, 158쪽.

  이 이상의 작전계획에 따라 야마타연대의 주력은 20일부터 대한군정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삼도구에서 청산리를 향해 진군한다. 이에 대한군정서의 김좌진 사령관은 적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을 갖춘 백운평 고지에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를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 《獨立新聞》, 1921年 3月 1日,<北路我軍實戰記>.

 독립군이 매복한 백운평 고지는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듯 하다 절벽이 솟은 곳으로 그 사이에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고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는 단 하나의 오솔길이 나 있다.  李範奭, 《우등불》, 25쪽. 이범석은 백운평전투의 교전 현장의 지형과 지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 장교의 정찰보고에 의하면 이 골짜기를 따라 십여 리를 더 들어가면 5, 6리 길이에 2리 넓이의 빈터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 줄기 실개천이 흐르고 그 양 옆은 칼로 깎아 세운 듯 한 산이 있다한다. 또 그 주위는 무성한 밀림에 둘러싸여 단 한 사람도 자유롭게 빠져나갈 수 없는 철옹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백운평의 독립군 매복지는 그 공지를 바로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 위이다. 이민화 부대가 매복한 백운평 우측 지대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 부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愼鏞廈, 《韓民族獨立軍動史硏究》(乙酉文化社, 1985), 464쪽.

  야마타연대의 전위부대인 야스카와(安州) 소좌 인솔하의 1개 중대는 독립군의 매복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21일 아침 백운평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이 독립군 매복지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근접하자, 600여 명의 독립군은 계곡 중앙의 공지에 다다른 일본군을 향해 일시에 집중사격을 개시한다. 결국 30여 분간의 집중공격 끝에 독립군은 200여 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獨立新聞》, 1920년 12월 25일, <北墾島에 在한 我 獨立軍 戰鬪情報>.

  야스카와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뒤따르던 야마타연대의 주력부대도 공지로 향했지만 사상자만 속출했다. 일본군은 끝내 백운평에다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숙영지(宿營地)로 패주했다.  朴殷植, 『韓國獨立軍動之血史』, 『朴殷植全書』上 (檀國大出版部), 1975), p.639 참조.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공전의 대승을 거뒀다.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퇴각하는 아마타부대를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 방면으로 길을 지나 밤을 새워 갑산촌(甲山村)으로 행군한다. 이도구 북쪽 천보산 방면에서 안도현으로 돌아 청산리로 침입해 오는 야마타연대의 별동 기병대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8, 291쪽

나.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

 『我軍이 中央高地에 在하야 自己 友軍과 戰하는 줄로 誤認하고 敵이 敵軍을 猛射하니 我軍과 敵軍에게 包圍攻擊을 受한 一隊는 全滅에 陷하였는데 基數는 四百餘名이더라』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前資揭料.

 아군이 중앙고지에 있고 자기의 우군과 전쟁하는 줄로 오인하였지만 적이 적군을 맹렬히 공격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고 제1대는 전멸에 빠져 기수는 400명이더라.

  중앙고지에 들어선 아즈마지대의 일부는 한쪽에서는 독립군으로부터, 다른 한쪽에서는 아즈마지대의 다른 부대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즉 독립군 연합부대를 포위공격하던 아즈마지대의 남 · 북 두 부대는 홍범도가 지휘하는 부대에 의해 전면에서 공격을 받는 한편, 독립군 예비대의 뛰어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자살전까지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국민회군, 한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광복단)가 이도구의 완루구에서 아즈마지대 주력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다.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백운평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김좌진의 독립군 제 2연대가 갑산촌에 도착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을 때, 촌락민 동포들은 일본군 1개 기병중대가 천수평(샘물둔지, 중국명:수천자)마을을 들어가서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에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작전회의를 연 결과 천수평의 일본기병대를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북로군정서는 10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연성대가 선두에 서고 본대가 뒤에 서서 천수평을 향해 진격한다.  일본군은 도전(島田:시마다) 중대장의 지휘 하에 있던 기병중대 120기로서 독립군이 100리 밖 청산리 부근에 있다고 착각했음인지 소수의 기병 순찰만 세워놓고 병력을 촌락 안에 모아 놓았다.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김훈중대로 하여금 북쪽 산을 타고 나아가 신속한 행동으로 만기구를 점령해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이민화중대로 하여금 천수평 남방 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10월22일 새벽 5시 30분경에 일본군 기병중대가 잠자고 있는 촌락과 말을 매어 놓은 토성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李範奭, 『우둥불』(사상사, 1971) p.56~64 참조.

 이범석은 2개 중대를 이끌고 천수평 북쪽 냇물 한 복판을 전진하여 냇물 언덕의 사각(死角)을 끼고 천수평 동쪽에 이르면 즉각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려 정면공격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한 차례의 혼전이 있은 다음 일본군중 4명만이 말을 타고 탈출한 이외에는 116명이 전원 몰살당한다. 전멸당한 일본군은 기별 제 27연대 소속의 전초기병중대였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2명과 부상 17명의 경미한 것이었다.  李範奭,  앞 글: 李範奭 , 앞 책, p.63 참조.

 이것이 천수평전투이다.

라. 어랑촌투(漁郞村戰鬪)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 수색기병중대를 섬멸한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도망쳐 간 4명의 일본군 기병이 어량촌에 설치한 그들의 기병연대 사령부에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독립군측 대한군정서군이 먼저 어랑촌 후방의 고지를 장악하여 일본군의 탈출로를 차단하고, 이어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대가 같은 고지 최고봉에 초진하여 대한군정서군을 지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일본군은 우세한 전력만을 믿고 희생을 무릅쓴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일본군은 단시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자 공세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 하고 기병대는 천수평의 서방 고지를 따라 독립군의 측면공격을 시도 하게 하였다. 포병과 보병은 독립군 진영의 정면에서 격렬한 공격을 재개, 오전9시부터 재개된 일본군의 공세는 해질 무렵까지 반복된다. 그러나 지형상 우세를 점한 독립군은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적절히 차단하면서 효과적인 반격을 가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러한 어랑촌전투 결과로 독립군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군 300명을 사살한 것으로 밝혔다.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기병 연대장 가노 대장를 비롯해서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측은 참패 사실을 숨기고 단지 전사자 3명 부상자11명이라는 허위기록을 남겼다.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8, 223~224쪽.

 북로군정서 사령부는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600명으로 발표했으며, 중국 관변(官邊)은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300여명이라고 추산하였다 박은식(朴殷植)에 의하면,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에도 이도구전투에서 가노 연대장을 비롯하여 대대장 1명, 소대장 9명 하사이하 병사의 사상자가 800여 명에 달했다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朴殷植, 『韓國獨立軍動之血史』, 『朴殷植全書』上 (檀國大出版部), 1975), p.672~673 참조.

 독립군측도 그 동안의 전투 중에서는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크다. 「墾北視察員報告」 告警 第37231號, 1920年 11月 25日字 참조.

  어랑촌전투 후 대한군정서는 안도현의 황구령을 향해 소부대로 나뉘어 행군한다. 또한 행군과정에서도 일본군과 도처에서 산발적인 혈전을 벌이기도 한다. 완루구 산림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대한군정서군은 23일 낮 맹개골 삼림 속에서 일본군 30여 명을 발견하고 이들을 기습함으로써 기병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어 맹개골로부터 20여 리 떨러진 만기구(萬麒溝)에서도 50여 명의 일본군과 조우전을 벌여 30여 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은 맹개골전투와 만기구전투도 청산리 대첩의 여러 전투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 고동하곡전투(古洞河谷戰鬪)

  청산리대첩 가운데 마지막 전투인 고동하곡전투는 10월 25일 밤부터 26일 새벽 사이에 벌어졌다. 홍범도 독립군을 탐색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등하 골짜기에서 독립군의 야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독립군은 일본군의 접근과 야습에 대비해 주변 각지에 매복해 있던 중이었다. 이와같이 만반의 대비를 갖춘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군이 돌격해 오자 독립군은 여러 방면에서 즉시 반격을 가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45분간 계속된 전투 끝에 독립군은 일본군 2개소대 가운데 10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의 한 전투보고서에서도 이 전투 당시 “동쪽 하늘이 점차 밝아오자(살았다는 안도감에서 일본군) 장병들이 얼굴마다 기쁨이 나타났다”고 술회하였을 정도로 일본군이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愼鏞廈, 《韓民族獨立軍動史硏究》(乙酉文化社, 1985), 494~497쪽.

  고등하곡전투를 마지막으로 하여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의 독립군은 10월 26일 낮부터는 안도현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단 멈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 10월21일 새벽까지 6일간의 걸쳐 숨 가쁘게 전개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청산리대첩은 한국독립군의 대승리로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3. 결론

  3.1운동전후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독립을 향한 굳은 신념과 처절한 노력이 3.1운동을 계기로 무장적 형태로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으로 일시에 표출된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측이 절대적으로 압승한 사실은 많은 자료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은 청산리에서의 참패 사실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피해상황을 자의로 축소함으로써 객관적 자료로서의 신빙성을 결여하고 있다. 피해에 대한 공식 발표는 하지 않고 단지 “기대에 반하여 성적이 의외로 좋지 않았다. 다소 실패로 종결되어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暗號戰報」 暗 No. 別電 1920年 11月 22日字, 姜德相編, 『現代史資料』28, p. 304.

 라고 추상적으로 패전을 인정하였다.

  최초의 백운평전투에서는 병장 3명 전사, 하사 1명과 보병 2명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병 4명과 기병 7명이 부상한 정도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홍범도 부대의 야간 매복전에 걸려 일본군 추격대가 거의 전멸된 고동하곡의 격전에서는 아예 “아(일본군)의 피해 없음. 적(독립군)의 사상자 30명”이라고 하여 전황을 허위로 보고하는 등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尹炳奭, 《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0), 198쪽

 사료로도 일본군의 피해상황은 파악하기는 어렵다.

  독립군의 피해상황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한 자료는 임시정부 파견원 안정근(安定根)이 상해 임시정부에 제출한 비밀 보고서이다. 여기서 안정근은 10월 22일부터 3일간 여러 전투에서 300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결국 독립군의 전체 피해 규모는 여기에다 21일의 백운평전투와 25~26일의 고동하곡전투 등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입은 인적 손실의 규모는 350여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愼鏞廈, 《韓民族獨立軍動史硏究》(乙酉文化社, 1985), 500~501쪽.

   일본군의 간도 침략은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데 대한 일대 보복 살인극이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침략의 구실로 삼았던 것이며, 그 실상은 간도 동포에 대한 대 학살극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청산리 부근의 동포는 물론이요, 그들이 주둔한 만주의 모든 지역에서 한국인 촌락을 불 지르고 학교와 교회당 등 한국 농민들의 양곡들을 모두 불태웠다. 청산리 전투 이후 근대 연말까지 간도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비무장의 무고한 한국 민간 동포가 무려 2만 명이나 되었다. <간도학살사건>이라고 부르는 일본군의 이 살육과 약탈은 역사에서 유례를 보기 힘든 잔인무도한 만행이었다.

  독립군 부대들은 동포들의 피해를 고려하여 1920년 12월 근거지를 소. 만 국경 지대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독립군 단체들의 연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간도대한국민회, 훈춘대한국민회, 대한신민회, 군무도독부, 의군부, 혈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을 편성 하여 일제의 힘이 덜 미치는 북방의 소. 만 국경 지대를 향하여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尹炳奭, 《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0), 208~211쪽

  독립군과 소련 공산군 사이에 군사협정이 채결되었다. 이 협정에는 일찍부터 이곳에 와 소련군 장교로 일해 왔던 오하묵의 역할이 크다. 협정 내용은 간단하였다. 독립군은 소련군을 돕고 소련군은 독립군에 군사원조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으로 독립군은 소련군으로부터 대포 15문 기관총 5백 정 소총 3천정 등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배신과 참화였다.

  1921년 6월 2일 돌연 소련 당국이 독립군에게 무조건 무장해제를 요구하여 왔다. 4개월 동안 독립군이 남의 나라 혁명을 위해 봉사하여 온 것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데, 비록 한인부대가 러시아 상급기관의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한인부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결성되어 러시아혁명을 지원하는 외국인부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일방적인 조치는 러시아공산당 혹은 코민테른이 말하는 피압박민족해방이라는 슬로건 내부에 짙은 자국 중심주의의 색채를 띠고 진행되었던 것이다.  尹炳奭 外, 《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0), 232~233쪽

  이 부당한 요구에 대하여 독립군은 단호히 항의하였으나 이미 소련군이 이중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것이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시베리아 이국땅에서 또 다시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었으니 기막힐 일이다. 6월 28일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미리 유리한 고지에다 대포와 중기관포를 장치하고 독립군을 향해 조준하고 있는 소련군에 도전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군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처절한 항전과 탈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이 싸움으로 독립군은 사망자 2백 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97명을 내고 시베리아를 탈출하였다. 포로가 된 독립군 병사 가운데에는 이청천장군도 들어 있었다. 장군은 상해 임정의 요구에 의해 석방되기까지 옥사직전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이때 소련군으로 넘어갔으며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시베리아에서 독립군이 겪은 이 변은 혹사사변, 또 자유시사변이라 부르며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고 새로운 할 일전의 전기를 마련코자 결행한 만주 독립군의 고난의 장정은 결국 이처럼 쓰라린 수난사로 귀결되고 말았다. 참변 이후 잔여 부대는 북만주로 다시 넘어왔으며, 일부는 현지에 잔류하고 나머지는 사산하게 되었다. 그 뒤 남북만주 각지의 독립운동세력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통신과 연락을 재개하면서 군단 정비와 통합작업에 들어가 1920년대 중반 만주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갔다.

  삼둔자 봉오동전투, 청산리 무장항일전투 이 모든 무장 항일운동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없이 자랑하고 알아둘 것이 있다.

  첫째 소규모 유격대로 인식된 독립군부대가 일본정규군 대규모 토벌부대와 대등한 혈전을 벌인 결과.

  둘째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끈질긴 열망과 백절불굴의 감투정신이 전 서계를 경악시킨 점

  셋째 시들어 가던 우리 민족의 항일 투혼을 일깨웠다는 점이 청산리 항일대첩이 거둔 가장 값진 성과라는 점 이 점을 마음에 새기며 청산리무장 항일대첩의 진정한 의의와 값진 성과가 폄훼 혹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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