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문/기행문
작성자 함윤희
작성일 2007-07-04 (수) 16:06
분 류 논문
   
항일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작성자 : 함윤희

광복이라는 말은 본래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이지만, 한국인들에 있어 그것은 일제(日帝)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통치를 받던 상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광복이라는 말은 민족독립의식, 국권회복의식 및 자주의식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1) 내적 발전과정

광복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일독립운동은 엄밀하게 말해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한 한반도의 ‘강제합병’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의 광복 때까지 만 35년 동안 지속된 민족주의 운동을 일컫는다. 그러나 반일독립운동의 내적 조건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1919년 발생한 3·1운동이 두 가지 이유에서 민족독립운동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3. 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독립운동의 목적이 현대 국민국가의 건설에 있다는 것을 천명하였다는 것, 둘째, 이 운동에 참가한 200만 명이 외친 ‘독립만세’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3. 1운동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의 수립을 의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반침략운동을 통해 전민족이 실천적으로 정치적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국민국가 건설의 움직임은 1919년에 접어들면서 일제에 의한 탄압의 손길이 덜 미치던 국외로부터 구체화되고 있었다. 3. 1운동 직전인 2월에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민국의회>가 설립되면서 정권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 그 시초였다. 또한 중국의 상해(上海)에서도 3. 1운동 직후 국내에서의 탄압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무원(國務院)을 구성함으로써 상해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3. 1운동을 정권형태로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4월 23일 한성정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3. 1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 세 곳에서 임시정부 구성을 보게 되었으나, 그것은 곧바로 통일된 정권형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한민족의 기본 과제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제에 따라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가 개헌의 형식으로 노령의 임시정부를 흡수, 통합하고, 다시 한성정부를 흡수통합함으로서 마침내 상해에 단일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와 외교활동이라는 두가지 방향에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연통제는 국내 및 간도지방의 연락조직이며, 이것을 통해서 국내와 간도지방에 대한 조직확대와 자금조달을 하였다. 외교활동으로서도 파리강화회의, 태평양회의, 그리고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활동 등을 벌였으나 국제연맹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이후에는 중국, 미국, 영국, 소련에 대한 개별적인 설득작업을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후원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1894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강압적인 ‘개화정책’요구에 대한 항거운동으로서 국내에서 전개된 의병활동이 1910년경에 이르러 무장항쟁의 한계를 노출하게 되자 그 잔여세력이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거점을 옮겨 항일독립투쟁을 지속하였다는 사실도 광복운동의 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경학사(耕學社)와 그 산하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이동휘(李東輝) 중심의 독립군과 사관학교, 김좌진(金佐鎭)의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 대첩,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활동 등은 이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내의 광복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군사적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고, 그것이 정당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와해되는 악순환을 거치고 있었다. 우선 노동조합운동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반일독립운동을 기본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투쟁과 노동운동은 많은 점에서 동일시될 수 있었다. 농민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성격변화는 3. 1운동 당시 보여주었던 민족적 단결이 분열되어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혁명노선으로 민족세력이 양분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러한 민족 내부의 분열상을 타개하고 재통합을 기하려는 시도로서 1927년 2월 신간회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으나, 1931년에 가서 일제의 탄압과 압력, 그리고 내부의 분열로 붕괴되고 말았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표면상 소멸됨에 따라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발전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즉, 1932년 이후 전개된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의 통합작업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39년 김구(金九)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金元鳳)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합해 성립된 전국연합전선협회이다. 이것은 민족적 통일기구를 일단 성취시켰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1940년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특히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여 정치·경제 및 교육의 균등 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한국독립당의 정강은 이전의 정당들의 정강을 종합한 것으로서, 당시 독립운동단체들의 기본 방향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의 패배가 머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하여 광복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전개된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광복을 위한 실질적인 의미를 지녔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광복군이 창설되고 1942년 4월 김구와 김원봉이 광복군사활동의 단결통일에 합의하게 됨으로써 광복군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일본군과 싸우는 각 전선에서 광복군이 활약하게 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영국군의 요청으로 1943연 6월 이후에는 인도·버마 전선에도 투입되었다. 또한 미군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미군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도 받는 등 국내투입계획도 진행되고 있었으나,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이 계획은 실현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2) 국제적 발전과정

일본은 오랜 기간에 걸친 한반도 침략에의 야욕을 불태워오다 청일·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강제적인 군사력에 의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미국은 필리핀 영토에 대한 야심을 일본에 의해 방해받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일본의 대한 침략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의 패배가 점차 분명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심의 최초의 표현이 1943년 11월 개최된 카이로 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한국에 관한 것은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는 독일에 대한 전후처리문제, 소련의 대일 참전문제가 논의되었고,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카이로 선언의 논의 위에서 대책을 합의하였는데, 미·소·중 3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거론하였다. 그리고 8월 9일 소련은 얄타협정에 의거해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2일에는 한반도의 웅기·나진, 14일에는 청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38선 이북 전역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동시에 모든 곳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정권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이러한 재빠른 움직임에 대응하여 하지(J. R. Hodge)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 제1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패전하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구체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이루어진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는 한반도의 국토분단선인 38선을 확정하게 되고, 이는 한민족에게 새로운 차원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부과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0
3500
윗글 청산리 대첩의 전황과 역사적 의의
아래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성립과 활동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13 항일 무장 독립전쟁과 청산리 전역의 군사사적 의의 조필군 2010/04/06 21:59
12 (제2기)독립군 전적지 탐방기-한·중 대학생 청산리전투 현장서 만세 합창(.. 정호영 기자 2007/08/28 14:21
11 (제2기)독립군 전적지 탐방기-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오르다(2) - 정호영 기자 2007/08/28 13:50
10 (제2기)독립군 전적지 탐방기-독립군의 산실 신흥무관학교를 찾아(1)- 정호영 기자 2007/08/28 13:41
9 제2기 독립군적전지 탐방연수(백두산 기행문)살아생전 그 곳을 갑니다 4 한보현 2007/09/04 21:53
8 청산리 대첩의 전황과 역사적 의의 한보현 2007/08/25 17:36
7 항일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 함윤희 2007/07/04 16:06
6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성립과 활동 이상희 2007/07/04 15:32
5 鐵驥 李範奭과 靑山里抗日大捷 정준 2007/04/05 14:37
4 재조명 바람 부는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 김병륜 기자 2006/10/01 17:27
3 중국 항일투쟁 전적지를 다녀와서 장순휘 2006/09/28 11:11
2 연변 쪽에서 백두산을 오르다 김남석 2006/09/25 00:43
1 단일 민족의 어휘가 가슴에 스며진 곳을 여행하며 김남석 2006/09/25 00:5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