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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희        
작성일 2007-07-04 (수) 15:32
분 류 논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성립과 활동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성립과 활동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한인애국단 성립 배경

2. 한인애국단 활동   

   1) 의열투쟁으로 전환

   2) 한인애국단 조직

Ⅲ. 결론

※. 참고 문헌

Ⅰ. 서론

백범 김구(1876~1949)는 1893년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이후부터 그의 평생을 나라의 독립운동에 바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불리한 내외 여건으로 인하여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독립운동도 전반적으로 침체하였다. 이에 임정은 독립운동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타개책으로 1920년대 초기 활발했던 의열 투쟁 방략을 선택하였고 이를 백범에게 모두 일임하였다. 그리하여 백범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1932년부터 도쿄(東京), 상해(上海), 대련(大?), 국내 등지에서 연속적으로 의열 활동을 펼쳤다. 그 대표적인 의거였던 이봉창의 동경 의거(東京義擧)와 윤봉길의 상해의거(上海義擧)는 독립운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결과로 당시 침체되어 있던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으며 독립운동 진영에서 백범과 임시정부의 위치가 다시 부각되게 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우리민족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한인애국단의 활동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체로 백범과 의사(義士)들의 인물연구에 대한 일환으로 다루어졌을 뿐이고 애국단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백범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두기 보다는 한인애국단의 성립과 의열 활동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1930년대의 의열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애국단의 활동 전후의 일본의 상황과 침체된 독립운동의 상황을 언급하겠다.


Ⅱ. 본문

1.한인애국단의 성립배경

  한인애국단의 성립배경에 일본의 만주침략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인하여 고조된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독립운동의 침체에서 돌파구를 찾던 임정요인들에게 중?일간의 위기를 이용하여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에게 반일감정을 더욱 더 강화시키고, 한편으로는 한국의 지사들이 일본 요인의 암살과 일본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일을 하는 한인애국단 성립을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그 시기에 일본은 자국 내의 계속되는 경제적인 불황이 1930년대의 국제적 불경기와 겹쳐져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한 경제적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자 일본의 전쟁을 주도하였던 군부세력들이 만주 몽고(蒙古)방면의 침략을 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만주지역은 3?1운동 이후 한국독립군의 항일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서 독립군이 한?중 국경선 부근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는 남경정부의 장개석이 북벌을 추진하고 있었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자, 중국으로의 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에서는 중국의 통일을 어떻게든 막아야만 하는 상황 이였다. 이와 같이 일본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의 확대와 한국 독립군 활동의 근절, 그리고 중국대륙의 통일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만주침략을 계획하게 되었다.

일본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중촌진태랑(中村震太郞)대위 피살사건, 그리고 만주사변의 직접적 사건이 되었던 유조구(柳條溝)철도폭파사건을 구실로 하여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침략을 시작하였다. 이후 4개월 여 만에 만주의 주요도시와 철로가 관동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일본은 곧바로 괴뢰 만주국 건설을 위한 공작을 진행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인 1930년대 초에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반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상황 이였다. 이 때 그 타개책이 시급히 필요하였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1920년대 초에 활발했던 의열투쟁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930년대의 의열 투쟁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독립운동이 침체에 빠지게 된 몇 가지 요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국내의 실정을 살펴보면, 1919년 3?1운동 직후의 한껏 고조되었던 독립운동이 국제적인 외면과 일본의 악착스러운 탄압, 그리고 주도세력들의 분열로 인하여 1923년경부터는  국내의 여러 조직망이 해체되었고, 동시에 국내와 해외동포들의 독립운동 사이에 유기적인 연락이 단절되고 말았다. 또한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군벌정치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 민족운동의 소지는 거의 상실된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두 번째로 시베리아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의 실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시베리아의 동포사회는 1920년대 초기에는 독립전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나 1922년 이후 소련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어디보다도 먼저 독립운동이 종식되었다. 그 반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일본 군경(軍警)의 끈질긴 추격이 있었으나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25년 소위 마쓰야협정(三矢協定)으로 인하여 일제의 추격이 더욱 조직화되었고, 1927년에 민족유일당촉성운동(民族唯一黨促成運動)이 결렬되어 큰 타격을 입었고, 공산주의 세력이 증대되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조선혁명군 등 각종 독립운동기관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어 가면서 일본에 항거하고 있었다.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의 한국독립전쟁의 기지를 위협하자 한국독립군과 만주의 중국군이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 및 괴뢰 만주군과 맞서 싸워 몇 몇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적, 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고 상호 연락이 두절되는 등 고전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 면밀하게 침략 전을 전개하여 군사적 성공을 거둔 일본은 한국인에 대한 회유정책, 즉 항일투쟁에 몸소 싸운 경험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일제에 대한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묻지않는다는 방침을 표시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사실상 저항운동, 특히 민족진영의 저항력이 약화되었다. 이것도 만주에서의 군사 활동이 여의치 못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다.

세 번째로 상해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1930년 무렵에는 상해의 임시정부도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던 초기와는 달리 베르사이유 체제를 기조로 하는 국제적 안정 질서와 경제적 공황, 일제의 탄압,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유입 등으로 극도의 혼란을 보이고 있었다. 임정이 약화된 원인으로는 우선 내분을 들 수 있다. 악착스런 지방색과 사상적 대립과 편견 때문에 일제에 대한 투쟁보다도 동족끼리 싸우는데 정력을 소모하는 비중이 휠씬 컸다.

그 결과로 1923년 1월 3일에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는 임시정부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이 되었다. 국민 대표회는 지금까지의 독립운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여 재정비하려고 했던 것으로 임정은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독립운동자가 거의 망라된 것이어서 상당히 동요되었다. 국민대표회는 많은 논란 끝에 5월 15일에 결렬되고 말았지만 결국 임시정부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아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넣고 말았다.

임정의 위기는 점차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으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지만 명목상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였든지 간에 임정의 간판을 유지하면서 그 법통을 지켜온 실력자는 백범 김구였다. 이승만이 탄핵되어 물러난 후에 박은식이 대통령이 되어 국무령제로 헌법을 고치고 이상용이 국무령이 되었으나, 조각(組閣)에 실패하여 한동안 무정부상태가 계속되기도 하였다. 결국 1926년에 김구가 국무령이 되어 간신히 조각(組閣)에 성공하여 국무위원제로 개헌하여놓고 물러났다. 이후 이동녕을 주석으로 새 내각이 출범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침체기의 내각임으로 김구를 비롯한 소수의 지도자들이 극심한 경제적 곤란 속에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2. 한인애국단 활동

1) 의열투쟁으로 전환

한국의 독립운동계에서 군사 활동의 기지였던 만주지역을 1932년 일본에 의해 빼앗기게 되자 고심하여 모색한 방략이 의열 투쟁 이었다. 그러나 의열 투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 광복단(光復團)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어 의열단이나 병인의용대,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의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독립운동전반을 지배하고 지도할 만큼 솟아나지는 못하였고, 1930년대 초기의 것처럼 모든 독립운동의 역량을 집중한 의열 투쟁은 아니었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국 독립운동의 침체현상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활로를 개척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동포사회나 한국민족사에 실망을 안겨준 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초기에 추진한 의열 투쟁은 내외 여건으로 말미암아 다른 길을 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것으로 독립운동의 사활을 건 성격이었다.

이러한 의열 투쟁을 택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독립운동이 침체된 주요원인이 인물난, 재정난이었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의열 투쟁은 인물, 재정난을 극복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 이였다. 군사 활동이나 그 외 큰 규모의 조직을 통한 투쟁은 그 조직의 지도자 간에 논의하고 합의하는 절차가 필요하며, 신속성과 비밀유지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의열 투쟁은 한 두 지도자의 영도 하에 소수인원으로도 전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더 적절한 것이어서 인물난에 봉착한 1930년대 초기의 독립운동으로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재정난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의열 투쟁 이상의 것이 없었던 것이다. 즉 적은 인원과 자금으로 독립전쟁 이상의 효과를 올릴 수 있고, 어떠한 외교활동보다 높은 외교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성단체들에 의해 추진되었던 의열 활동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가 추진하던 특무공작(特務工作)이라 칭하는 의열 활동으로 모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특무공작에 대한 일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이 총 집약하여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해에서는 임정이 쇠퇴함에 따라 강력한 통치처가 없었으므로 각 단체별로 특무공작을 추진하고 있었고 여기에 임하는 사람들이 여러 단체에 중첩하여 소속해 있었으므로 어느 누가 어느 단체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단체이건 당시 상해의 민족주의계 특무공작은 직, 간접으로 임정에서 승인된 것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 추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인애국단 조직

  1930년대 초기의 상해 독립운동전선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대단히 침체되어 있었다. 공산주의 세력이 팽창하여 야기된 민족주의 측과의 분열과 다툼은 임시정부의 활로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그 주변에서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논의가 거듭되었다. 이때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을 붕괴시키자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거듭하여 대책을 논의한 결과 군사작전을 능가할 공포작전으로써 특무공작을 추진할 것을 채택하여 일제에 철퇴를 가하고, 전세계에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특무대라는 명칭으로 이를 추진하기로 하고 김구에게 일체를 맡기고 그 결과만을 임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후에 한인애국단 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제1차로 북경여행이 예정된 내전(內田;우찌다) 만철(滿鐵)총재를 폭살하기로 하였으나, 그의 여행이 중지되어 실현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애국단의 조직으로서의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처음에 조소앙(趙素昻)이 특무대를 의생단(義生團)이라 명명하고 선언?강령?규약 등을 만들어 주었는데 김구가 분실하여 그 후 김구는 이름이나 강령?제약도 없이 활동했고, 한인애국단이란 이름은 이봉창의 동경의거를 앞두고 1931년 12월 13일의 선서식에서 공식화 되었다고 한다.

우선 애국단은 임시정부 산하의 가공단체로 임정이 그 실체였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이봉창이나 윤봉길이 모두 거사 직전에야 애국단에 가입하고 선서를 한 후에 곧바로 거사에 돌입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실체를 가진 조직체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애국단이란 명칭은 실제로는 가공적인 것으로 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테러활동을 하는 것이 위신에 저촉되기 때문에 지휘자도 임시정부 요인이며, 집행자도 임시정부의 사명을 걸고 행하는 것이나, 거사 후에는 반드시 한인애국단원으로 자처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논자도 있다. 이는 임정과 애국단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써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별동대의 성격을 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당시의 애국단과 경쟁관계에 있던 무정부주의 계통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정화암(鄭華岩)도 윤봉길을 ‘임정의 한인애국단’소속이라고 임정과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봉창의 애국단 가입 선서식 장소를 제공한 “안공군(安恭根)도 애국단원이었다.“라는 것이나 이봉창의 사형집행일에 ”전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였다.“라는 사실에서는 일정수의 단원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도왜실기(屠倭實記』에서는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시어 제일 먼저 가입한 사람이 이 의사였다“라고 밝히고 있어 안공근도 애국단원이었다는 기록과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것만으로는 한인애국단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와같이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는 그 조직원을 정하는 데서부터 극히 주의하여 정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굳은 결심과 능력이 있는 사람만을 선정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요인은 물론 같은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서로 알지 못하게 하여 조직사업에 최대한의 비밀을 보장하였다. 따라서 당원들은 상호간의 연락이나 결속보다는 지도자인 김구의 지시에 의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실천하고 완수하도록 하였다.

한인애국단이 처음에는 임정과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고 지향하였다 하더라고 당시의 자금난이나 인물난으로 보아 의열단과 같은 단체처럼 독자적인 조직 구성을 갖추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김구 휘하에 사람이 모이면서부터 ‘전 단원에게 단식을 명할’만큼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주도하였던 김구는 자금과 인물의 확보 심혈을 기울였다. 본국과 만주와는 연락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자금조달은 미주와 하와이의 교포들에게 호소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김구는 그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영어에 문외한이었던 김구는 엄항섭, 안공근 등에게 의뢰하여 편지를 부쳤고 그 보람이 있어 얼마간의 재정적인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중국 민중의 항일기세가 오르자 임정은 중국 측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임정의 재무부장이기도 했던 김구는 해외동포들로부터의 성금과 함께 이 군자금을 저축해 둘 수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김구는 자금의 확보와 함께 인물을 물색하였지만 이는 더욱더 어려운 문제였다. 이봉창이 나타나기 직전의 상해 임시정부의 상황은 인물부족으로 심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구는 문지기 자격이었던 자신이 국무령까지 오르게 된 것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한창 적에는 상해의 독립운동가가 천 여 명이나 되던 것이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라고 하였다. 그 원인은 이광수(李光洙)등의 변절자가 생겼고,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되고, 생활난으로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적자원의 부족상태에서 이봉창, 윤봉길이 등장하여 김구와 함께 의열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미주, 하와이, 등의 해외동포로부터 모금된 많지 않은 자금을 가지고 김구 주변의 소수의 인사들을 주축으로 상당히 불리한 여건 하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Ⅲ. 결론

이상 본문에서는 1930년대 초기에 일제의 대륙침략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국내외의 독립운동의 절망적인 침체를 타개하고자 조직되었던 한인애국단의 성립배경과 조직을 살펴보았다.

한인애국단의 비밀스러운 조직과 성격상 정확한 지도원칙이나 추구하는 이상이 밝혀지지 않아 단지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김구 개인의 애국심과 의기로 사람을 감화시켜 활동한 것으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이 조직이 와해되어 독립운동에 있어서 주체적인 위치를 확립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구와 애국단은 이봉창의 동경의거 후의 위험한 상황과 상해사변 중 피신생활을 하면서도 상해를 중심으로 국내와 대련에 공작대를 파견하였고 적의 심장부인 상해에서도 끊임없이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리하여 애국단의 활동은 국내외의 한국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각성을 가져다주었으며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부각시켰다는 데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김구,   『백범일지』. 나남출판사, 2002.

이강훈,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서문당, 1983.

이현희,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동방서적, 1987.

정화암, 『나의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도서출판자유문고,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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