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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병륜 기자
작성일 2006-10-01 (일) 17:27
분 류 탐방기
   
재조명 바람 부는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

재조명 바람 부는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

 

-재조명 필요성 높은 철기의 삶

-조국 광복과 건국에 바친 일생

항일무장투쟁에 일생을 바친 수많은 독립지사 중에서 초대 국방부장관 철기 이범석(1900.10~1972.5) 장군만큼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이도 흔하지 않다. 독립군을 양성한 신흥무관학교나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교관, 일본군에 대항한 청산리전투 참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광복군 참모장,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 등 항일투쟁과 건국에 기여한 그의 경력은 다채롭기 그지 없다. 이런 뚜렷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장군은 그에 합당한 조명을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서도 재평가

-중국 언론에서 이범석 재조명 특집기사

-한국 대학생들도 발자취 따라 중국 답사      

하지만 이장군이 서거한지 34년이 되는 올해, 이장군의 삶을 다시 한번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그 신호탄은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서 먼저 쏘아 올려졌다.

올해 3월1일 중국 운남지역에서 발행되는 곤전신문에 이범석 장군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운남육군강무당 출신 국내외 명사를 소개하면서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이장군을 집중 소개한 것.

기사는 중국 쿤밍시 사회과학원 원장 롱둥린의 연구 결과를 인용, 이장군을 한국의 전기적 영웅으로 소개하면서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000명을 소탕한 업적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또한 1942년 이장군을 소재로 한 중국 작가의 소설인 󰡐북극풍정화󰡑가 출간된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별도의 기사로 게재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런 움직임은 방송까지 연결되어 중국의 국영 CCTV에서 제작한 항일무장투쟁 관련 다큐에서도 이범석 장군을 비중있게 소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장군을 재조명 해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8월7일부터 17일까지는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광복청년아카데미 소속 대학생 70명이 이장군을 추모하고 그 발자취를 되돌아보기 위해 중국 현지 답사를 다녀온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동안 대학생들이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이나 김좌진 장군의 사적, 전적지를 답사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장군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답사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 한 평생 독립투쟁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광복군등 대일무장항쟁의 외길  

과연 이범석 장군은 어떤 인물일까.

1900년 10월20일 서울 용동에서 태어난 이범석 장군은 1915년, 불과 16세의 나이에 중국 망명을 선택한다. 중국에 들어간 이장군은 애국지사 신규식 선생의 주선과 중국 혁명가 손문 선생의 후원으로 1916년 중국군 사관학교인 운남육군강무당에 입학한다.

1909년에 설립된 운남육군강무당은 중국 대륙 서남쪽에 치우친 변방 운남성에 위치한 학교지만 중국 현대사를 장식한 주요 인물을 배출한 명문으로 유명하다. 중일전쟁 당시 활약한 중국군 장교 중 다수가 바로 운남육군강무당 출신이다. 국민당 계열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도 운남육군강무당 출신이 수두룩하다. 흔히 중국 홍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우는 주덕, 중공군 10원수의 한명이라는 섭검영도 이곳 출신이다.
 

이장군은 수많은 군사 인재를 배출한 전통있는 운남육군강무당에서 군인으로써의 확고한 자질을 기를 수 있었다. 이장군의 아호, 󰡐철기(󰡐鐵驥)도 운남육군강무당에서 얻은 것이다. 이장군의 운남육군강무당 졸업식 때 학교 기병대 구대장인 중국군 장교 서가기가 󰡐강철같은 천리마󰡑가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 준 것이 철기라는 아호다.

이장군은 운남육군강무당을 졸업한후 1919년 만주로 향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된다. 1919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다음해 폐교될때까지 무려 21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한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다. 당시 함께 교관요원으로 근무한 인물이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 지청천 장군, 일본 육사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광서 등이다.

1920년 이장군은 김좌진 장군의 초청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로 자리를 옮긴다. 김좌진 장군 휘하의 독립군에게 근대적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만든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초빙된 것이다.

하지만 교육을 완전히 마무리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손길을 뻗쳐왔다. 간도일대에 한국 무장독립투쟁세력이 집중되자 이를 우려한 일제가 토벌작전을 결심한 것. 이범석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동안 연성대장으로 전투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이후 일제의 가중된 압력과 구 소련의 배신으로 북로군정서가 해산되자 이장군은 중국군에 투신,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1928년 중국 동북항일군 작전참모, 1933년 낙양군관학교 한전군관대 생도대장, 1936년 중국 3로군 고급참모 등이 그 시절의 경력이다.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자 이범석 장군은 광복군 참모장이 되고, 다음해인 1942년  광복군 제2지대장이 된다. 훗날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준엽, 언론인이자 정객으로 활약한 장준하 선생이 모두 당시 제2지대 소속으로 이장군의 부대원이었다. 이장군이 대장으로 있던 광복군 제2지대는 미국 정보기관 OSS와 협조해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광복군의 실질적 주력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장군은 1945년 8월13일 광복군 국내정진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본토 수복작전 참전이라는 무장투쟁세력의 오랜 꿈을 실현하기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처럼 이장군은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광복군으로 연결되는 항일무장투장 세력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건국과 건군과정에서 이범석 장군이 국방부장관으로 남긴 가장 뚜렷한 업적으로는 국군 장병들의 정신전력 강화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장군은 국방부장관 재임시절 정훈병과 창설을 주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무너진 청산리대첩비

-붕괴 우려되는 기념비에는 󰡐위험하니 가까이 하지 말라󰡑 경고판

올해들어 중국과 한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이범석 장군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이범석은 여전히 망각의 영역 저 편에서 잠들어 있는 잊혀진 영웅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 중에 하나가 200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 세워진 청산리대첩비 기념비다.

기자는 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에서 후원하는 광복청

년아카데미의 중국답사단 동행취재과정에서 8월10일 청산리대첩비를 직접 참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대첩기념비 어디에도 이장군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정준 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중국 영토 내에 세운 기념비에 한국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 이름을 넣기가 부담스럽다는 현지 의견이 반영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못지 않게 이장군이 전투지휘에 큰 공헌을 한 점을 고려한다면 청산리대첩비에 이름이 빠진 것은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중국이나 북한, 심지어 우리나라 일부 진보계열 사학자들조차 청산리전투 당시 이장군의 활약상 뿐만 아니라 청산리대첩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인색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청산리전투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의 활약이 더 크며 김좌진, 이범석이 이끈 북로군정서군의 공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독립투쟁에 공헌을 했어도 반공노선을 뚜렷하게 견지한 김좌진이나 이범석 장군에 대해서는 정치적 선입견을 가지고 가급적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들의 속내라고 할 수 있다.

광복청년아카데미의 중국 현지 답사 과정에서 8월12일 개최한 연변대학교와의 공동세미나에서도 이런 미묘한 시각차가 노출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사를 주제로한 세미나에서 중국 연변대학교측 일부 연구자들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사를 더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발표 문안을 놓고 광복청년아케데미와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것. 정치적 입장 때문에 독립투쟁의 역사조차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의 일부 전사연구가들은 이장군이 공적 중 하나인 청산리대첩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도 보이고 있다. 6·25전쟁을 다룬 󰡐한국전비사󰡑의 집필자로 유명한 전사연구가 사사끼(佐佐木春隆)는 󰡒일본측 전쟁사 사료에 청산리전투와 관련된 전사자는 불과 12명으로 나온다󰡓며 청산리대첩의 전과에 의문을 표한다.

이러한 일본측의 다분히 악의적 평가에 대해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아직 적극적인 반론을 펼치지는 못한 상태다. 독립투쟁사의 상징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청산리대첩조차도 충분하게 연구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중국에 방치된 관련 전적지의 현 실태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이장군이 근무하기도한 신흥무관학교는 현재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상태다. 중국 전적지 답사 동행취재 과정에서 찾은 신흥무관학교 터는 현재 옥수수밭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청산리대첩비의 현실도 암담하다. 청산리대첩비 입구 계단에는 󰡒위험하니 가까이하지 말라󰡓는 중국 길림성 화룡시 문화재당국의 경고판이 서있었다. 󰡒부실공사로 대첩비 지반이 붕괴되고 있고 기념비 자체도 돌이 떨어져 나가는등 안전문제가 생겨 고육지책으로 세운 안내판󰡓이라는 것이 현지 안내자의 설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중국 상하이 등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의  보존 문제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였으나 피를 흘려가며 투쟁했던 만주지역 독립투쟁 전적지에 대해서는 너무 소솔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를 누볐던 선열들의 독립투쟁 현장을 돌아보면서 가장 절절하게 느낀 감정은 가슴벅찬 감동보다는 우리들의 무관심에 대한 반성과 아쉬움이었다.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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