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광장
작성자 위민락원
작성일 2011-06-30 (목) 12:40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빼앗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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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6년 토지개혁법령에 의해 실시되었던 북한에서의 토지의 개인소유화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에 끝마친 농업협동화의 실현과 함께 종결되고 말았다. 개인 소유 땅은 없어지고 농민들은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인부 신분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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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3.8.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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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차이점은 전자는 사유재산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요 , 후자는  사유재산을 보유하기 위하여서다. 즉, 공산주의자가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배한다는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 토지를 국유화하야 국영농장 혹은 공동농장을 만드러서 농민을 노동자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경작권을 확립하는 데 불과하는 무상분배란 소련의 농민이 실허하는 것과 같이 조선의 농민도 이것을 실허할 것이며 설혹 이것을 권력으로 강제한다 하더래도 그에 순응할만한 도덕심이 수반되지 않기때문에 국가적견지에서 우려되는 것은 소유욕의 압살에 의한 생산감퇴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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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유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기계적 토지국유화로서는 농업생산을 증대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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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박헌영씨가 조선의 소련방가입을 운운한 것은 , 일시적 실언이 아니라 박씨의 신념인 것이며 조선이 소련방에 가입한다는 것은 비단 박씨뿐이 아니라 , 공산주의자라면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일 것이다. 박씨가 소련방가입 운운을 부인하는 것은 민족적 감정에 대한 전술적 도회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민족을 문제시한다는 것도 그 민족의 유지와 발전과 번영을 과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무산계급의 독재정권수립을 위하야, 세계혁명을 위하야 그 씨족을 여하히 유도할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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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12월19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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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形容(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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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정식으로 소련의 가맹공화국의 하나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
  [...김일성이 세운 것이 아니라 소련 고문들이 나왔고, 소련태생의 한인 2세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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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김일성이 세운 제도는 스탈린식 독재체제였습니다. 김일성이 세운 것이 아니라 소련 고문들이 나왔고, 소련태생의 한인 2세들이 나왔습니다. 정권기관으로부터 시작해서 경제, 문화기관에 전부 나왔습니다. 그들이 소련을 모방한 제도를 북한에 세웠습니다.

그 시기에는 김일성도 자주적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빨리 정식으로 소련의 가맹공화국의 하나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후에는 무슨 주체사상을 항일 빨치산투쟁 할 때부터 생각했다는 소리도 나오지만,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6·25전쟁까지는 완전히 소련고문들이 와서 당, 정권기관, 경제·문화기관을 전부 지도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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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당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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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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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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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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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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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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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金九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저 혁명이란 유혈사업으로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한 후 또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金九는 반문했다.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 제3국제당(코민테른-편집자注)의 지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이동휘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불가능하오』
 

  金九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께서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저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빛을 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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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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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머리 제일 나쁘고 못살았다는 사람을 간부로 등용시켜 일을 시킴으로 하여 반항이 없고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가족주의가 커지면서 지방주의가 되고 지방주의가 커지면 반란이 일어난다고 모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직장생활에서 형님, 동생, 오빠, 아저씨라는 말을 못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들 호상간에는 동무라고 부르라 명령을 내렸고 김일성만 동지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아저씨 형님 소리만 들으면 집단 회의를 열고 집단 공격도문 비판을 해도 안 들으면 무서운 징벌과 6개월 무보수 로동까지 시키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금방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면 20대들이 40대, 50대들을 동무라고 불러 나이차이 없이 같은 동기 동창으로 만들어 놓았고 심지여는 며누리가 시아버지를 보고 시아버지동무 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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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유일한 민족으로 남게 되고 다시 40%를 숙정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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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학생들은 남한 민족과 북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을 통일이라 생각하는데 北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북한은 金日成의 지침으로 「남한 주민중 30%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고 정해 놓았습니다. 군인, 경찰, 고급 공무원, 재벌 등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反動 관료, 매판자본가, 악덕 지 주 계급입니다. 對南 전략 내부 文件에 기록돼 있습니다. 통일은 남한 주민 30%를 제거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통일 후, 2단계 사회주의혁명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유일한 민족으로 남게 되고 다시 40%를 숙정하는데 한총련 대학생들은 중산층이므로 역시 숙청 대상입니다. 본인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그들의 부모는 숙청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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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3.28. 금요일. 동아일보
 

남쪽 차저 온 북조선동포
매일 평균 천5백명을 돌파

봄을 찾어 38선을 넘어 오는 우리 겨레의 피난동포들은 16개소의 검역소에서 검역? 구호를 실시하고 있는데 동두천 방면으로부터 매일 평균 9백여명 청단 방면으로부터 2백여명이 드러오고 있으며 그외의 산간협로를 거처 들어오는 동포도 만호므로 매일 평균 1천 5백명이 남조선으로 드러 오고 있는 형편이다.

검역소의 조사
 
 
 
 1947.7.1. 화요일.   동아일보
 
5월에 북쪽에서 온 동포
7만6천6백여명
 
보건후생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5월중 38선을 건너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으로 넘어 온 동포들에게 개성을 비롯한 6개 집결지 검역소에서 시행한 검역성적은 다음과 같다.

예방주사인수 35,389
소독인원수 38,786
보통병자수  1,968
전염병자수

합계 76,654
 
 
 
 
 

 [...현물세는 2할7부인데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빼앗기고 있다.
  ...노동자는... 매일 그 어떠한 집회에도 참석할 의무를 ......]
 

 동아일보 1949.5.13. 금요일.
 
이북은 지옥
월남동포담
 
본적을 38이북 함남 북청군에 둔 염철 씨는 지난 4월 14일 당지를 출발하여 경기도 파주군을 거처 5월 6일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최근 이북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북에 있는 절대다수의  동포는 괴뢰독재정권에 신음하고 있다. 농민에 대한 현물세는 2할7부인데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빼앗기고 있다. 노동자는 8시간 노동제의 미명하에 노동시간외에 강압적으로 매일 그 어떠한 집회에도 참석할 의무를 지게 되어 있어 자유로운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세금으로써 시민의 고혈을 착취하기 위하여 산업은 대소를 막론하고 등록제로 되어 있으며 막중한 세금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악정이 다수의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괴뢰정권을 좌우하는 계급의 야망인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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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고 나서 농민들은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을 받은 농민을 제외하고는 다 불만이었지요.
그런데다가 막상 수확을 할 때가 되자 북한정권은 일제하 공출보다 더 많은 비율로 수확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마음도 돌아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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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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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이 건국 이정표의 단초
 
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이 통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북한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반동으로 쫓겨서 등 적극적인 탈북 동기가 82%에 달했다. 그러면 절대다수 월남자들은 북한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체험했기에 고향조차 버렸던 것인가.

그들은 소련군의 노략질과 폭행을 보았다. 가짜 장군 김일성의 독재를 보았고 자유민족진영에 대한 탄압을 보았다. 공산체제의 강화와 토지개혁의 기만성을 보았고, 종교박해를 겪었으며, 정치보위부라는 비밀경찰에 신경을 써야 했고, 공산당 외곽단체 강제 가입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 김구 등 민족계 지도자에 대한 악의적 성토를 줄곧 들어야 했으며, 인민군의 강화로 남침 준비에 광분하는 낌새를 감득할 수 있었다.

월남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실상을 한마디로 ‘생 지옥’같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가정법으로, 만약 월남자들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에서의 ‘북한관(觀)’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평양방송이 불어대는 소위 ‘민주개혁’의 성과로 북한은 이상적인 지상낙원처럼 비쳐질 판이었고,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선동선전에 현혹되어 남한의 민심도 북한체제를 추종해야 되는 것으로 왜곡될 판이었다.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자들의 발걸음이야말로 자유대한을 건국하는 이정표의 첫걸음이었다고 말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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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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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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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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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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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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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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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
 ... 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 右二·左一쯤으로 낙착되지 않을까 한다...... ]
 
 
 
  5·10선거 1주년에 즈음한 각계의 여론 동향
 
 
  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아시아 대륙에 있어서 침투 확대되고 있는 침략적 공산주의의 확대 번식의 방지를 제창하는 세계 민주주의 정치세력의 여론은 서구를 중심한 북대서양동맹과 동 성질의 극동 공동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태평양 인접 민주주의 제국 간의 공동정치목표를 위한 방위동맹 체결 촉구의 소리가 높은데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반을 이룬 5·10 총선거 1주년을 맞이하고 9일 국내 중요 정당·사회단체에서는 현하 당면한 정치문제에 언급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國民會
 
1. 38선은 미소의 책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또 북한에서 蘇軍의 침략공세와 그들의 지령으로 남벌을 計策하는 공산군이 준동하는 한 韓美나 태평양의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 후 철퇴함이 당연하다. 우리는 금번 개성전투 지휘자가 소군임을 지적한다.

2. 한국은 국련 결의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성립되었고 또 승인받은 당당한 국가이다. 따라 국련가입은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거부권 행사는 실로 부당한 처사로서 이는 그들의 약소국가 침략정책의 表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소련의 반성과 한국가입 거부를 취소하기를 희구하는 동시 다수 국가의 의사를 무시하는 비민주주의적 안보거부권 조항을 세계 公論에 의하여 삭제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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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년 총선거 대비, 남북통일의 구현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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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1. 명년에는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될 것으로 보는가
2.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3. 만일 명년에 통일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월남동포의 특별선거제 문제가 재대두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여기 대한 견해 여하
 
 朝民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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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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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獨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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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익이 다수를 점령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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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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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국진영이 절대 우세를 점령할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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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勞農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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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右二·左一쯤으로 낙착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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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靑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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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생각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성취된다면 좌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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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선거 1주년 기념사
 
5·10선거 1주년의 역사적 기념일에 際하여 李始榮 부통령을 위시한 정부 수뇌층과 재한 외국명사의 의의심장한 기념사의 요지는 각각 다음과 같다.

△이북의 참가요망, 부통령 李始榮:어느덧 역사적 5·10선거의 1주년을 맞이하였다. 회고하면 기쁨과 걱정이 많다. 어느 나라와 어느 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방침을 고려하여 5·10선거를 절대 배격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대의명분이 있는 우리 동포들은 국제적 公然한 자유선거로 제헌과 정부수립에 일로 매진하여 蘇국가를 除하고 세계적 48개국의 일치승인을 얻어 우리 대한민국이 국제단위의 일원으로서 통일 방면에 적극 추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2주년 기념식에는 남북이 합석하여 이 기념식이 있어야 할 것을 빌어 마지않는 바이다.
 
△민국기초 확립, 국회사무총장 談:1947년 유엔총회의 결의와 국내 민주진영의 열렬한 추진으로 거행된 작년에 5·10선거야말로 세기적 대성사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2천만의 애국열에서 나타난 것인데 이로써 성립된 국회는 그동안 민의를 대표하여 헌법, 농지개혁법적 중요법안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는 점차 확립되어 가고 있다. 불원 북한에도 총선거를 행하여 현재 100명의 공석을 채우고 평화와 통일이 실현될 것이다.
 
△민주승리를 확신, 국회의장 申翼熙:5·10선거 당시를 회고하건대 소위 남북협상이니 지명추천이니 하여 여러 가지 비민주적인 말썽이 많았으나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유권자 총수의 9할 3푼까지가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투표하였다. 이것은 민주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요, 더욱이 파괴분자들의 박해와 위협이 극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전무후무의 격으로 질서정연하게 투표를 감행하였다는 것을 무능력·무조직하다고 비평하던 외국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 결국 민주주의의 正經大道는 반드시 통한다는 위대한 교훈을 받았다.

앞으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토를 통일하여 북한 1천만의 대표 100명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수를 보충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진영 즉 민족진영이 총단결로써만 실현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진리가 점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經原的 대원칙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요, 우리의 올바른 주장은 반드시 관철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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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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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했지만, 현물세를 30% 걷는 것은 농민을 다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라는 단일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것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농지개혁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물러갔지만, 이승만의 용단으로 거의 조봉암의 안대로 농지개혁을 완결 지었다.

그것이 바로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이었다. 즉 북한에서는 30%씩 영원히 새로운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30%씩 단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을 자신이 소유하여 자손에게도 길이 물려 줄 수 있게 한 것이다. 1년에 50%~ 60% 소작료를 바치던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영원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30%씩 5년이 아니라 500년을 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 더 남는다. 지가를 상환한 다음에 국가에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것이다. 만약 농지세를 10% 이상 걷어 가면 고려초나 조선초보다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료를 알 수 있는 것이 1950년의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이 해에 정부는 200만 정보의 농지에 대해서 140만석의 농지세를 걷기로 했다. 이것으로 세율을 계산해 보면 한국의 농지개혁이 농민에게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알 수 있다. 1950년 곡물 생산이 345만 톤 곧 2156만석. 140만석을 2000만석으로 나누면, 0.07 곧 세율이 7%였다. 성군인 세종조의 세율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는 세율이 30%이고 한국은 7%였던 것이다! 고추와 마늘, 배추와 무 등에 대해서는 따로 걷지 않은 걸 감안하면 6% 정도였을 것이다.
 
국민 대부분이 전혀 세금을 낼 형편이 못 되어 1950년 당시 총세입 중 조세수입은 17%밖에 안 되어(나머지는 대부분 미국의 원조) 조세부담률이 2.6%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농민들에게는 이 7%도 매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1956년 신익희가 한강 백사장에 모인 30만 군중 앞에서 이 토지수득세를 성토하여 크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내 땅을 갖게 된 것이 너무 좋아서, 이론가들이 5년만에 지가를 상환하는 것이 농민들에게 가혹하다고 혹평했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대개 3년 안에 다 갚아 버렸다. 1957년까지는 100% 갚았다. 또한 1956년부터 PL480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지원 받기 시작하면서 나라 사정이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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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에 걸친 법개정을 통한 우여곡절 끝에 개정안은 1950년 2월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농지개혁법은 최종 확정되어 정부는 이것을 3월 10일 법률 128호로 공포했습니다. 같은 달 25일 이 법의 시행령이 공포되며, 4월 28일에는 시행규칙이, 그리고 농지분배에 관한 세부규정과 요령을 담은 농지분배 점수제규정은 6월 23일에 공포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농지에 대한 실질적 매수 및 분배는 전쟁 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했고, 북한으로부터 서울을 되찾은 그 해 가을에나 가서야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동안 널리 알려진 중론이었습니다.
북한도 이와 유사하게 남한 정부는 어떻게든 농지분배를 하지 않으려다가 '조선전쟁' 개시 후 인민군이 전체 면의 78.5%에 해당되는 1,198개 면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후'에야 마지못해 실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로서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정부수립 이전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고 이러한 그의 의지 덕분에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적어도 농지의 70~80% 정도에 대한 분배가 단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1980년대 중반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의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성을 보지 못했던 농지개혁사 편찬사업이 다시 추진되면서, 농지의 실제 분배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한 결과 농지의 분배가 시행령이 공포(3월 25일)되기도 전에 거의 완료되었음을 밝혀낸 것입니다.(김성호, "한국토지제도의 연속성과 단절성(하)", 『농촌경제』, 8권, 4호, 1985년 12월, p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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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당이 지연전술로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4월 농림부에 ‘농지개혁 지침’을 내려 보내 “비록 입법이 되지 않아 추진상 곤란이 없지 않으나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문서를 보면 시행령 공포 하루 전인 1950년 3월 24일 이미 농지분배 절차가 완료되어 4월 10일부터 분배 통지서가 발급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련법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 결단으로 밀어붙인 일종의 월권행위이자 초법적 행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관련법규도 없이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인해 전 농지의 92% 이상이 자작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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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24.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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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참살을 당한 우리 애국자 수효는 4천명이나 되며 피난해서 살어오는 사람들도 서울에 처음 들어올 때의 전쟁동포들과 비교해 보면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모다 얼굴이 초라하게 야위고 있었으며 의복도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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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린 아애들이 길가에서 국군이 버린 빈 깡통을 줍고 있어 그들에게 물어 본즉 그와 같은 깡통을 처음 본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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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분한 사실을 보고 말로서는 형언을 못하고 그저 울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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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1.16. 동아일보

 평양과 함흥 (2) 두개의 좌담회
 

평양과 함흥에서 민간유지들과 좌담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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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공포의 5개년동안 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은 흡사 지상천국에 대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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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된 토지를 어떻게 재조정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괴뢰정권의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을 크게 환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생문제와 아울러 그들이 심각한 안색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민군"의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간 자제들이니 이들 포로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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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통치의 장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는 살인 강도정치에 불과하지만 그 강력한 조직력은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게재지명 민주신보
게재일자 1951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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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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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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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무부, 북한 토지개혁 실태조사 발표
 
게재지명 부산일보
게재일자 1951년 03월 31일
 
[워싱턴 29일발 USIS] 미국무성은 최근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실태조사를 완료하였는데 28일 동 省은 소위 북한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완전한 기만으로서 북한인민을 토지의 노예 내지 무자비한 관료정치의 희생물로 하였다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공산주의 치하 토지를 배당받은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국가에 바쳤으며 그들은 상시 감시의 관계관 이외에 시·군·도의 관리소배들로부터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이 결과 그들은 작년 말에 있어 生産推持를 위한 이외에 전보다 더욱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그 보수로서는 공산주의 경제의 방직공장으로부터 배당되는 면제품 구입에도 불충분하였다.
 
1. 공산주의 정권은 5년 간에 있어 신 토지소유자로부터 그들의 독립성을 여지없이 빼앗고 그들은 국가 계획경제란 기계의 예속물화 하는데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1950년에는 농업조치로서 집단농장의 실현도 未久에 근박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토지의 기술적 소유제도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하 완전한 기만으로 되고 말 것이며 전 농민계급은 농업무산계급으로 하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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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정권이 토지를 분배한 후 新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는 영구히 공여한 것이니 매매 대차, 저당은 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증명서를 받았다. 즉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그 사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사용료로서 25%의 현물세를 지불하였다.

1947년에 세율은 논 27%, 밭 23%, 沓 10%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평가 때문에 실질적으로 규정율을 초과하는 토지세 이외에 농민들은 또한 특별세 부과금 그리고 소위 자진헌납이라는 重荷 아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을 취□하는 외에 공산주의 정권은 농민들에게 지방건설 내지 광산작업을 무보수로 강요하였으며 매 호구는 1 내지 2개월 간 자진노동을 제공하였고 18~55세의 전 농민에는 1년에 1회씩 20일간의 강제노동이 부과되었다.

(1) 북한 농민들은 항상 관공서 숫자와는 반대로 전농생산량은 일제시의 수준에도 미급하였으며 정부발표에는 멀리 미달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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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학교 3학년, 전쟁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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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어 날짜가 흘렀는데 1차 진공 한다면서 많은 인민군 부대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서 밥을 해달라고 하여 마을 인민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 무조건 밥을 해주게 되었다. 밥을 안 해주는 집은 반동이라고 하였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일시적 후퇴를 하는 시기였다. 다시 돌아오는 그 많은 군인들을 또 밥을 해먹이게 되었다. 한집에 쌀도 한도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많겠나요? 그때 밥을 해내라 하여 쌀이 떨어졌다고 하면 반동이라고 고함을 치며 총부리를 둘러대고 온 집안을 수색하여 쌀이 없으면 총으로 닭과 돼지를 쏘아 잡아가곤 하였다.
 
이때로부터 인민들은 인민군대를 무서운 사람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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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몇일이 지났는데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을 때 2일 후에는 국방군들이 밥을 갔다 준다는 소식들이 왔다. 사람들은 좋아서 기다리다 그날 9시경에 국방군들이 대형 화물차에다 밥을 싣고 왔는데 밥을 철갑모만한 크기로 뭉쳐서 하얀 백지에다 싼 것을 세 대당 세 개씩 나누어 주어서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밥이 맛이 있는지 그 전에 집에서 먹던 밥은 대상도 안 되기 때문에 어른들은 말하기를 곡창지대는 남쪽이기 때문에 맛있다고 하면서 통일이 되면 그곳 남쪽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주민들의 감정은 달라졌다. 인민군대는 총부리를 둘러대고 호통을 치면서 뺏뜨려 먹고 갔는데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밥까지 만들어서 공급을 해주니까 정말 고마운 국방군들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 밥은 남한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실어다가 100리 떨어진 산간지대까지 공급하여 주었으니 어떻게 많은 밥을 지어 날라 왔는지 정말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전투 실전을 그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60평생을 살아왔고 이런 말만 하면 선전을 한 것으로 취급하여 없애 치우기 때문에 그랬다.
 
그 후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개인들의 토지를 다 뺏어가지고 공동체로 만들어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선전들을 남조선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을 계기로 전국이 다 휴식하는 짬을 리용하여 불의의 전쟁을 일으켜 수다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말 마디나 좀 하고 바른 말을 하여 정당한 의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혁명 분자에다 명칭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수십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머리 제일 나쁘고 못살았다는 사람을 간부로 등용시켜 일을 시킴으로 하여 반항이 없고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가족주의가 커지면서 지방주의가 되고 지방주의가 커지면 반란이 일어난다고 모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직장생활에서 형님, 동생, 오빠, 아저씨라는 말을 못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들 호상간에는 동무라고 부르라 명령을 내렸고 김일성만 동지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아저씨 형님 소리만 들으면 집단 회의를 열고 집단 공격도문 비판을 해도 안 들으면 무서운 징벌과 6개월 무보수 로동까지 시키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금방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면 20대들이 40대, 50대들을 동무라고 불러 나이차이 없이 같은 동기 동창으로 만들어 놓았고 심지여는 며누리가 시아버지를 보고 시아버지동무 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곳곳마다 이런 현상들이 벌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웃기군 하였지요. 그 후 10년 이상 되여서 부터는 자기 나이와 아래 나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동무라고 부르고 자기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동지라 부르게 하여 19세 난 아이들도 60세 어른에게도 또한 자기 아버지와 같은 분들에게도 꼭꼭 동지라고 불렀지요. 김일성도 동지라 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말을 못했지요.
 그리고 악수도 서양식이라 하여 악수를 못하게 했고 조건은 손에는 무서운 균들이 득실득실하기 때문에 그 병균들이 있다 하여 병의 근원이 된다고까지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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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위원회는 수확 철이 가까워지자 벼, 조, 수수 할 것 없이 낱알들을 일일이 세어서 수확량을 매겼고, 심지어 대추나무, 감나무 등 과일나무까지도 미리 수학을 예정하고 공출 량을 매겼다. 농민들은 일제 때가 심했다고 해도 이렇게 낱알까지 세는 일은 없었다고 불평이 대단했다.

노동자, 농민들이 지주와 자본가에 의해 수탈당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이제 노동자, 농민들이 국가에 의해서 또다시 수탈당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인민해방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를 농민들은 뼈저리게 경험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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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교수는 “농지를 받은 농민은 이승만의 지지기반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포섭되었다”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든 첫째 계기가 농지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된 소작농들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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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지개혁과 농지개혁을 전후한 시기 지주들의 농지투매, 6-25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 등으로 인해 소작농들은 큰 부담없이 자작농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전체 농지의 92.4%가 自作地가 됐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전체 농지의 90%가 자작지가 된 일본의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부는 농지를 수용하면서 지주들에게는 地價증권을 발급했다. 地主에게 보상한 20억원의 대략 절반 가량이 地主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地價증권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농업사회를 산업사회로 전환시킨 한국자본주의의 시발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내걸고 시작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결국은 모든 농민을 小作農化하는 '농업 집단화'로 귀결됐다. 그 결과는 농업생산성의 저하와 기근, 대량 餓死 사태로 이어졌다.
  
   농업경제학자인 김성호 前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은 "李承晩의 농지 개혁이 한국의 번영을, 북한의 소련식 土地국유화가 오늘의 북한 참상을 불렀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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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은 60년 동안 대부분 심각한 영양 실조에 시달리게 되었다. 90년대 이후 몇 년이 아니었다. 무려 60년 동안 그러했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3대가 나란히 서면 할아버지가 제일 크고 그 다음에 아버지, 그 다음에 20살 넘은 아들이 크다.

북한 군인들은 평균 신장 162cm, 군화 사이즈 245mm로 한국의 중2 정도밖에 안 된다. 인구 당 경지 면적이 한국의 2배나 되지만, 북한 주민은 한국인보다 평균 10cm 작다.

전세계에서 가장 못 산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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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전략은 한 마디로 말하여 남한까지 수령독재체제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북한의 수령의 유일한 희망이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전력하며 이에 배치되는 것은 모두 다 무자비하게 배격합니다. 이것이 북한의 국내정책과 대외정책, 대남정책을 다 일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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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전 비서는 "북한의 모든 정치적인 기준은 수령의 권위를 높이는가와 지배범위를 넓히는가에 두고 있다"면서 "따라서 남한을 정복해 수령의 지배범위가 한반도 전반에 미치도록 하는 게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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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급적원수  ]
 
 

[....특히 소년단원들은 `김정일 장군님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일념으로 김 총비서를 목숨으로 옹위하는 `소년근위대`, `충성동이`가 돼야하며 `제국주의와 지주·자본가 등 계급적 원수를 끝없이 미워하는 애국투사가 돼야 한다`고 신문은  말했다.....]
 
 
[...이 신문은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위대한 전승업적을 빛내어 나가자' 제목의 사설에서 "모든 인민과 군장병들은 언제나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를 견지하고 조국의 안전과 민족의 존엄을 지켜나가야 한다"며 "온 나라 전체 인민이 우리 당의 총대 중시, 군사 중시 노선을 빛나게 구현하여 나라의 자위적 전쟁억제력을 백방으로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첨예한 반제 대결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조건과 환경은 달라질 수 있어도 투쟁정신에서 변화란 있을 수 없다"며 "모든 당원과 근로자들이 투철한 대적관념을 지니고 계급적 원수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고 언제나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를 갖추고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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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군사를 국사 중의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국방력 강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며 "누구나 총대를 사랑하고 군사를 성실히 배워 원수들의 그 어떤 불의적인 침공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744
 
北노동신문, 주민들에 긴장된 동원태세 촉구 
자위적 억제력 강화.불의의 침공 대응 강조
 
 2006년 07월 27일 (목) 11:38:00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551
 
北잡지 "애국심은 원수에 대한 증오심" 
 
 2005년 06월 29일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조국에 대한 사랑은 곧 원수에 대한 증오다."

29일 입수된 북한 잡지 '조선여성' 5월호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열렬하면 할수록 인민의 이익과 생명재산을 해치는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더 강해진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잡지는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무디어지면 사람들의 계급의식, 계급적 투쟁관점이 무디어져 사회주의 사상을 지켜낼 수 없고 계급적 원칙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무디어지면 적아(敵我)에 대한 구별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서 "적아에 대해 똑똑히 가려보지 못하면 종당에는 적들과 흥정하고 타협하는 길로 나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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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취계급 잔여분자들을 하나라도 살려둔다면 .....]
 
[...영화는 특히 말미에서 "원수들과는 싸우면 살고 굴복하면 죽는다"며 "제국주의에 대해 환상을 가지거나 착취계급 잔여분자들을 하나라도 살려둔다면 원수의 목에 걸어야 할 올가미가 우리의 목을 졸라매게 된다는 것이 신천의 피의 교훈이자 민족의 외침"이라고 역설했다.

영화는 또 "우리의 과녁은 하나"라며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미제 침략자들과 계급적 원수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신천의 원한, 민족의 원한을 풀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대립 속 北TV '신천만행' 다큐 방영 
 
 2005년 05월 26일 (목) 11:19:00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토론자들은 "계급교양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계급투쟁의 진리를 한시도 잊지말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원수들과 무자비하게 맞서 싸우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책동이 그 어느 때보다 악랄하게 감행되고 있는 오늘 온 나라에 반제 반미투쟁 열풍을 고조시키고 전민을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키는데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759

북,`계급교양 중앙토론회`개최 
 
 2003년 02월 27일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62
北 신문, 주민들 계급의식 무장 촉구 
 
 2001년 11월 09일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서울=연합뉴스) 최선영기자 = 북한은 주민들을 계급의식으로 철저히 무장시키는 것은 당의 중요한 임무라고 강조했다.
북한 노동당기관지 노동신문은 8일 논설을 통해 `노동자들의 당이 주민들을 계급의식으로 교양하지 않고 계급적 원칙을 버리는 것은 자기의 무덤을 파는 것과 같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북한이 말하는 계급의식이란 노동계급의 사명과 입장에서 모든 것을 사고.판단하고 투쟁하는 의식을 말하며, 계급적 원칙이란 노동계급의 이익을 지키고 노동계급의 원수로 규정되는 제국주의자.반동 관료배.지주.예속자본가 등과 끝까지 싸우는 입장을 의미한다.
 
이 신문은 특히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의식화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계급적 안목이 흐려져 적을 제대로 가려보지 못하며 나중에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 사회주의를 말아먹게 된다`고 역설했다.
신문은 지난날 소련과 동구권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되는 비극적 사태가 빚어진 원인도 노동계급의 당이 주민들을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키는 사업을 소홀히 하고 계급적 원칙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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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년단원들은 `김정일 장군님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일념으로 김 총비서를 목숨으로 옹위하는 `소년근위대`, `충성동이`가 돼야하며 `제국주의와 지주·자본가 등 계급적 원수를 끝없이 미워하는 애국투사가 돼야 한다`고 신문은  말했다......]
 
北, `소년단원 첫째임무 공부 잘하는 것` 
 
 2001년 06월 06일   연합뉴스  tongil@tongilnews.com 
 
 
 
북한은 학생 소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노동당기관지 노동신문은 6일 `조선소년단` 창립절 기념사설을 통해 `학생소년들에게 있어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중요한 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조선중앙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조선소년단은 `붉은색 머플러`로 상징되는 북한 어린이 단체로 1946년 6월  6일 발족됐으며 독자적인 기구없이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에 소속돼 있다.
인민(초등)학교 2학년이면 자동 가입되며 고등중학교 4학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출단돼 청년동맹에 가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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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 주었던 땅을 다 빼앗아 거두어 들여서는 국가가 독차지하고 주민들은 집체 농사에 내몰았다. 공장 기업소는 생산물을 자기들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하고 빼돌렸다. 財富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겨우겨우 생명을 유지하게 나누어주는 식량분배와 간장, 된장밖에 사먹을 수 없는 얇은 노임 봉투가 전부였다. 그렇게 피땀흘려 건설하고 생산한 모든 것은 독재자들의 우상화와 숭배용으로 무더기로 들어갔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전쟁위협」을 매일 떠들어대며 맞지도 않는 국방비 지출에 모든 것을 쏟아 넣었다. 주민들이 마치 전쟁하러 태어난 용사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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